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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보다 조금 뒤졌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형이라 했다.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로 항상 서로 맞서 서로 아래에 들지 않으려 했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쓰는데, 대적할 무사가 없었다. 그 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을 뵙고 아뢰었다. “당을 두루 돌아보니 신라 백성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해 도적들이 백성들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기 바랍니다”고 했다.
그리하여 대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었다. 그 후 해상에서 신라 백성들의 향인(鄕人)을 파는 자가 없었다. 장보고가 이미 귀하게 됐을 때에 정년은 당나라 관직에서 떨어져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사수(泗水)의 연수현(漣水縣)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수비하는 장수 풍원규(馮元規)에게 “내가 동으로 돌아가서 장보고에게 걸식하려 한다”고 말하니 원규가 말하였다. “그대와 장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
정년은 말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은 전쟁에서 깨끗하게 죽느니만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 가서 죽는 것에 비하랴.” 마침내 그곳을 떠나 장보고를 찾아뵈니, 술을 대접하며 극히 환대하였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의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장보고가 군사를 나누어 5천 명을 정년에게 주며, 정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가 아니면 환난을 평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년이 왕경에 들어가 반역자를 척결(剔抉)하고 새로운 왕을 세웠다.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대신 청해를 지키게 했다. 이것은 신라의 전기(傳記)와는 대단히 다르나 두목(杜牧)이 전(傳)을 지었으므로 둘 다 남겨 둔다(《三國史記》, <卷> 第四十四).
위의 고서에서 살펴보듯이 신라에서 끌려온 많은 백성들이 노예로 사역되고 있었다. 그때 당시 당나라에서 이를 금지한다고 하였지만 철저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당나라에서 이를 몇 번이고, 금령이 내려진 것을 고서를 보면, 도리어 신라로부터 노예 수입이 왕성하게 행해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때 당시의 청해(《三國史記》, 淸海 今之莞島)는 해상교통 상의 요충이던 청해를 장보고가 이를 거점으로 마련하고, 해적들의 백성 노예약탈 행위를 금압했다.
이 청해진〔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長佐里) 장도(將島:將軍島)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군사유적이다. 사적 제308호.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상무역권을 장악하던 요충지이다.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소장에 오른 장보고 그는, 당나라 백성들과 신라인들을 잡아 노비로 삼는 데 분노하여 관직을 버리고 귀국했다. 대왕에게 해적의 노략질을 근절하기 위해 청해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서기 828년(신라 흥덕왕 3년) 그는 청해진대사로 임명되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에 진을 설치했다.
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당나라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당과 일본 사이에서 해상무역의 패권도 장악했다. 이 유적으로는 해중에 나무 말뚝을 박아 두른 방책(防柵)이 있다. 그리고 1만 명의 식수정(食水井)으로 사용했다는 청해정이 있어 지금도 맑은 물이 솟고 있으며, 이 밖에 토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또 기와 파편 등도 출토되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은 전라남도의 서남 구석에 있는 섬이다. 그리고 남중국과의 교통선이 왕래하는 요지라 할 수 있다. 이 청해진에서 한반도 연안을 북진해 다시 서쪽으로 향하여 산동반도에 도착할 수 있어, 이런 의미에서는 북중국과의 교통의 요지이다.
또한 신라 배가 중국에서 일본에 회항 할 때에 지나가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新唐書》의 신라전(傳)에 의하면, 장보고가 자신을 추천했는지 여부는 판명되지 않으나, 그가 청해진대사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결과 해상에서 신라인을 매매하는 노예선이 없어졌다〔당나라에서 張保皐(新羅明神)는 무녕의 군 장군(藩鎭의 장교)을 지내고, 이후 귀국하여 청해진(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서 장군으로 있었다. 또한 반란을 평정하여 재상으로 임명된다. 청해진은 남중국과 일본의 해상교통선상의 요지이다. 특히 이곳에서 한반도 연안을 북진하여 다시 서쪽으로 향하면 산동반도에 도착이 가능하다.
청해진지역은 북중국과의 교통요지로서 일본의 배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되돌아 갈 때 지나지 않을 수 없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이다. 그 이전에는 청해진에 해적선이 침범해 노략질을 하고 신라인들을 매매했는데, 장보고의 용맹함과 훌륭한 병법에 의해서 해적선이 일망타진됐다. 만약 장보고가 무예와 병법을 습득하지 못하였다면, 해적들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는 무예와 병법을 겸비한 장수이기에 한.중.일 삼국의 해상을 평정할 수 있었다.〕.
장보고가 청해진로 임명된 것은 《三國史記》에 의하면 흥덕왕(?~836) 3년 4월이다. 즉, 서기 828년 당나라 문종황제(文宗皇帝) 태화(太和) 2년 무신. 일본 순화(淳和 : 쥰나) 천황 천장(天長) 5년이다. 《新唐書》에 ‘태화 이후로부터 해상에서 신라인을 매매한 자가 없다’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 연대 기록은 확실하다.
당초에 진이라 칭하는 것은 《三國史記》 직관지에 패강진전이 있을 뿐이라 한다. 선덕왕 3년 조에 ‘2월에 왕이 한산주를 순행하고 민호를 패강진에 옮기다’라고 하고 이듬해인 왕 4년 정월조에 ‘아찬 체신으로 대곡진 군주로 삼았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지(志)에는 ‘패강진전(浿江鎭典)’이라는 제목을 부치고 ‘두상대감([頭上大監)은 1인이니, 선덕왕 3년에 처음으로 대곡성 두상, 관등은 급찬에서 사중아찬까지로 했다. 이 대감은 7인이니, 관등이 태수와 같으니, 운운’하고 있다(張保皐關係硏究論文選集, 2002).
이 패강진, 대곡진이 설치된 것이 이 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때에 양진(兩鎭)의 제도가 성립된 것은 분명하다고 사료된다. 그래서 대곡진은 패강진에 예속된 것으로 보인다. 흥덕왕 3년에 장보고를 청해진로 임명한 이듬해 2월에는, 당은군 당성진으로 삼아 사찬 극정으로 가서 지키게 하였다. 문성왕(?~857) 6년 8월에 혈구진을 두고 아찬 계홍을 진두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7년에 장보고가 사망하자 13년 2월에는 청해진을 폐쇄하고, 그 사람들을 벽골군에 옮겼다는 것이 여러 고서의 문헌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진은 신라하게에 설치된 것으로, 그 국토의 서북 경계 또는 서쪽 경계에 설치하여, 주로 당에 대한 경비를 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장보고는 청해진대사인데, 두상대감 혹은 대감이라 칭하지 않고, 또한 군주라고 칭하지 않았으며, 대사라고 한 특별한 칭호를 사용했다(張保皐關係硏究論文選集, 2002).
청해진대사로서 장보고의 세력은 대단했다. 바다와 육지에서 망명한 무사들과 병사들도 모두 그 부하에 있었다고 하니, 세력은 막강했다. 일본과 당에 대한 무역의 이익을 거두어 부강해져서 마침내 신라 왕(王)의 힘도 그를 움직이기가 용이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러 고서 문헌에 보인다. 다음 칼럼 편에서 계속 연재한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전)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연구교수
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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